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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상황을 중심으로- 김 태 길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양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통틀어서 ‘현실’ 이라고 부른다면, 오늘의 현실에는 실로 많은 문제들이 있고, 그 문제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양상을 띠고 있다. 인구가 많고 사회의 구조가 어수선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구조까지 복잡하고 그들의 소망과 의견 또한 다양한 까닭에, 오늘의 현실에 어려운 문제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다른 동물들의 경우는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본능의 힘으로 해결하지만, 인간만은 많은 문제들을 사유(思惟)의 힘으로 해결해 왔다. 생각하는 능력이 강했던 까닭에 인간은 생물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자초했으며, 그 문제들과 대결하는 가운데 생각하는 능력 즉 지성(至聖)은 더욱 더 발달하는 일종의 순환을 거듭하였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작고 큰 집단을 이루고 살아 왔으며, 모여 사는 사람들의 수가 늘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욕구의 폭이 넓어지고, 많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의 집단이 커질수록 인간적 갈등이 심화되게 마련이다. 갈등은 풀어야 할 문제이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앞에 놓고 생각하는 가운데 사람들의 지성은 점점 발달하고, 발달한 지성은 다시 새로운 문제들의 근원이 되곤 한 것이다.
문제가 복잡할수록 그 해결을 위해서는 사유의 폭이 넓어야 되고, 문제가 어려울수록 생각의 심도가 깊어야 한다.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여러 각도에서 폭넓게 고찰하는 동시에 하나하나의 각도를 깊이깊이 생각해 들어가는 사유의 과정에 붙인 이름이 다름아닌 ‘철학’이다.
여러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하나의 시각에서 깊이 분석하는 사유의 노고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철학이 있다. 때로는 거창하고 모호한 것을 가리키는 이름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실은 ‘철학’이란 그 이상의 정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니다.
현실의 문제 즉 실천생활의 문제만이 인간을 생각하게 만드는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일부의 사람들은 사유 그 자체를 즐기게 되었고, 자연과 인간사의 불가사의한 현상 또는 사건에 대해서 느끼는 궁금증이나 의문도 사유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진 한가로운 사람들에게는 착실한 문제거리가 되었다. 사실상 서양철학의 발생ㄱ지로 알려진 고대 희랍 이오니아 지방의 철학은 실생활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사치스러운 문제들에 대한 한가로운 사람들의 사유의 기록이었다.
공자와 노자 그리고 석가모니 등을 대표자로서 자랑하는 동양의 철학은 윤리와 종교 또는 정치 등 주로 실천적 삶의 문제에 대한 사색이 그 주류를 이룬다. 한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칸트와 헤겔 등을 대표자로서 손꼽는 서양의 철학은 실천적 삶의 문제뿐 아니라 실천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사변적인 문제 또는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도 큰 비중을 두고 다는 전통을 세웠다. 동양의 철학적 사상가들은 주로 전문화도니 철학체계 그 자체를 가르치는 이론가로서 자처하였다. 또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철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설립되어서 철학의 이론적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철학이 전문화되고 철학을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늘어감에 따라서 철학은 조금씩 현실과 멀어져 가는 경향을 보였다. 철학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적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의 저명한 철학자들의 저술을 두루 설렵하고 그들이 다룬 문제들과 그들이 사용한 방법 및 그들이 도달한 결론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직업적 철학자들 사이의 상식이 되었다. 철학을 가르치고자 하는 교수와 철학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제일 먼저 물어야 할 물음은 “과거의 저명한 철학자들은 어떤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다루어 어떤 결론을 얻었는가?” 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선철들이 남긴 고전적 저술들 또는 현대의 천재들이 발표한 연구보고에서 찾아야 한다. 2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철학의 고전과 신서(新書)는 그 수가 방대하며 대개는 그 내용이 난삽하다. 더욱이 그것들은 여러 나라의 말로 기술되어 있는 까닭에, 그 일부만을 정독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결국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현실의 문제들과 정면에서 맞설 여가가 없는 것이다.
교단에서 학문을 강의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선학(先學)들의 연구에 의존하는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이룩해 놓은 업적을 계승하는 것은 학문을 위한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일 뿐 아니라, 자기가 직접 연구한 새로운 견해를 발표함으로써 강의시간을 메꾸어야 한다면, 한 달 동안 열심히 준비한다 해도 한 시간 가르칠 거리를 얻기 힘들 것이다.
자기가 직접 연구한 것을 교단에서 강의한다는 것은 예외적 천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이유를 떠나서도, 학자를 선학들의 업적에 매달리게 한 더 큰 이유가 있다. 학문은 보편적 진리의 발견을 목적으로 삼으며, 진리는 하나라는 통념이다. 학문 가운데서도 철학은 특히 절대적이요 보편적인 하나의 진리를 표방해 왔거니와, 보편적 진리를 세우는 것이 학자 특히 철학자의 사명이라면, 한 세기에 한 사람 정도 나올까 말까 한 천재도 아닌 주제에 저마다 그 하나밖에 없는 진리를 찾겠다고 나서는 것은 분수를 모르는 짓이다. 특히 후진국의 학자들은 세계사를 빛낸 소수의 위대한 석학들의 고전에 주석을 다는 것만으로 마땅히 만족해야 할 것이며, 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영광이 될 것이다.
진리는 보편적이요 하나라는 견해는 오로지 사실만을 밝히는 순수 이론의 분야에서만 주장된 것이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실천의 문제를 다루는 분야에 있어서도 진리는 보편적이요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중이 오래 동안 철학의 세계를 지배하였다. 보편적인 하나의 진리를 구체적 현실문제에 적용하는 마당에서 다소간 응용의 재간이 필요하겠지만, 본 원리는 옛날의 위대한 선철들이 가르친 그것으로 충분하고 또 그것이라야 한다고 믿어왔다. 유가들도 그렇게 믿었고 불가에서도 그렇게 믿었으며 기독교의 지도자들도 그렇게 믿었다. 요즈음은 마르크스의 철학이 바로 그 하나밖에 없는 보편적 진리에 해당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위대한 선철들의 가르침이 단순한 학문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종교의 권위까지 획득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믿음을 더욱 공고한 지반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한국은 세계 여러 나라와 비교할 때 학문 내지 사상의 선진국 가운데 손꼽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나, 세계 전체의 학문 또는 사상을 이끌 수 있는 최선진국임을 자부하기는 좀 어려운 실정이다. 옛날에는 중국과 인도에 한발 뒤졌고, 현대에는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 한발 뒤지고 있다.
한국이 학문과 사상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나라라고까지는 자부하기 어렵다는 자기진단은, 한국의 학자와 사상가들로 하여금 남의 나라의 위대한 고전과 천재적 신간을 소개하고 주석을 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게 하였다. 옛날에는 불교의 경전 또는 유가의 고전을 이해하고 주석을 다는 일에 큰 보람을 찾아야 했고, 현대에는 서구의 위대한 고전 및 빛나는 시간과 씨름을 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도 정도(政道 )일 수밖에 없었다. 불교의 경전 또는 유교의 고전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어쩌다 인도나 중국의 학자와 다른 해석을 하거나 본고장 사람들도 미처 생각 못한 새로운 주석을 달게 되면, 그것을 우리나라 학문과 사상의 독창성을 증명하는 확고한 근거로서 내세우는 경향도, 세계 안에서 차지하는 우리나라의 이제까지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외국에 능통하여 서구의 신구 학설들을 남보다 먼저 그리고 남보다 정확하게 소개한 것만으로도 사계의 권위자가 될 수 있는 우리나라 학계의 실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개념으로서의 ‘철학’ 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엽 이후의 일이고, 그것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행방 이후의 일다. 철학을 한국에 처음 들여온 학자들은 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가 일제하의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이고, 당시의 일본 대학에서 가르친 철학은 거의 모두가 독일의 철학이었다. 일본을 거치지 않은 유일한 조선 철학자 안 호상 박사도 독일에서 수학을 했으니, 초창기의 우리나라 서양철학은 독일 철학 일변도가 된 셈이다.
독일 철학 가운데서 그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칸트와 헤겔이 대표하는 고전적 관념론과 하이데거와 야스퍼스가 대표하는 실존철학이 주류였다. 고전적 독일 관념론은 주로 사변적 탐구의 체계이고, 그 가운데서 현실과 실천의 문제에 관한 처방으로서의 함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한국의 실정으로 볼 때는 그것들은 대체로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론이라고 불 수가 있다. 이차대전의 불안한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꽃을 피운 실존철학은 삶에 대한 고뇌와 구원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기는 하나, 자아의 내부로 침잠하는 이 철학 역시 격동하는 오늘의 현실무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처방이 되기에는 매우 미흡하다.
독일의 철학 가운데도 현실과 실천의 문제에 초점을 둔 마르크스 엥겔스 등의 사회주의 사상이 있기는 하나, 그 계열의 철학은 종전 이전의 일본에서는 금기로 되어 있었다. 일제시대의 조선 철학도 가운데 마르크스주의를 숨어서 공부한 사람들이 소수 있었으나, 해방 후에 모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해방 후에 새로 출범한 한국의 대학이 가르치고 연구한 철학은 현실 내지 실천과는 거리가 먼 독일의 관념철학이 주류를 이루는 결과가 되었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미국과의 교류가 빈번하게 됨에 따라서 한국의 철학계에 영미의 철학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세력이 조금씩 커져서 80년대의 중반에 들어선 현재에 있어서는 유럽 대륙의 철학과 대등할 정도의 판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미의 철학은 본래 경험에 토대를 두었고, 영국은 실천문제를 다룬 윤리학과 정치철학에서 혁혁한 전통을 세웠으며, 미국도 실천적 관심에 바탕을 둔 프래그머티즘을 한때 자랑하였다. 그러나 근대 우리나라에 들어온 영미철학의 주류는 그 고전적 실천철학이 아니라 20세기 전반을 풍비한 분석철학 내지 언어철학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분석철학은 철학의 본령은 규범 윤리학이나 정치철학보다는 인식론과 형이상학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우리나라에도 영미의 철학이 들어오기는 했으나, 실천과 관계가 많은 전통적 학설은 별로 들어오지 않고, 이론철학에 가까운 새로운 경향이 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동야철학’의 전문가로 알려진 사람들과 ‘한국철학’의 전문가로 알려진 사람들도 현실이나 실천과는 거리가 있는 학문을 해 온 점에 있어서는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동양철학’이나 ‘한국철학’의 고전 가운데는 윤리와 정치의 문제를 다룬 것이 많이 있기는 하나, 그 고전들이 씌어진 시대의 사회상과 오늘의 그것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중국이나 인도 또는 한국의 철학적 고전에 나타난 사상을 오늘의 현실문제에 직접 적용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동양철학 또는 한국철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강단에 서서 강의하는 일이 급선무였던 까닭에 우선 고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 고전 가운데 담긴 사상을 오늘의 현실문제에 연결시키는 일까지에는 힘이 미치지 않았다. 개중에는 우리나라의 전통사상 가운데 오늘의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귀중한 지혜가 충분히 들어있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주장을 설득력 있게 뒷받침할 만한 이론을 전개해 보여준 사람은 없었다.

그 동안 한국에 “철학이 빈곤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해방 이후에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문제해결의 방향을 제시하는 철학의 언어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오늘의 강단 철학에 대해서 느낀 실망을 그러한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 한국의 철학이 걸어온 길은 그럴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고, 길게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이퇴 (李進溪), 이 율곡(李栗谷)이 대표하는 성리학의 전개가 있었고, 유 반계(柳磻溪), 이 성호 (李星湖), 정다산 (丁茶山) 등으로 이어지는 실학 사상의 발전이 있었으나, 일제의 침략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철학은 일단 그맥이 끊겼다. 일제시대에도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 수도 적었고 그들이 공부한 것은 주로 독일 관념론이어서, 우리나라의 현실문제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미약한 명맥이었다. 결국 해방을 계기로 한국의 철학은 다시 시작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실적이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가 당면한 현실의 문제들은 너무나 무겁고 어려웠다. 겨우 의과대학 예과에 입학한 학생들 앞에 큰 수술을 요하는 중환자가 나타난 격이다. 사전을 찾아가며 외국어로 기록된 원전과 씨름을 할 단계의 실력으로써 어떤 방향이나 처방을 제사할 수 있는 그런 처지가 못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철학은 강단과 연구실 안으로 움츠리게 되었고, 이러한 추세는 모르는 사이에 학풍(學風)으로 굳어져 갈 조심을 보였다.
연구의 축적이 없는 한국의 철학계가 처음부터 현실과 그 개혁을 논하면서 성급한 제언을 서둘렀다 하더라도 크게 얻는 바는 없었을 것이다. 상식 수준의 견해를 ‘철학’의 이름으로 갑론을박하는 가운데, 깊이 있는 철학의 기반을 닦는 일만 늦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학문에 있어서도 기초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철학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선철들의 고전과 선진국의 새 학설을 연구하는 일이 필수의 과정이다. 특히 학문에 있어서 방법이 매우 중요하며 방법론에 있어서 서양의 철학이 크게 앞서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가 서양철학의 진수를 익히기 위하여 많은 세월을 바친 것은 결코 공연한 낭비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철학자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가운데도 어느 한 가지 계열로만 쏠리지 않고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널리 나누어 연구했으며, 또 서양의 철학도 유렵 대륙의 것과 영미의 것을 아울러 받아들이게 된 것도 긴 눈으로 볼 때 잘 된 일이다. 여러 계열의 철학설이 두루 연구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철학이 어떤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을 막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며, 장차 우리나라 철학의 발전을 위해서 소중한 밑거름을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철학이 새로운 출발을 한 지도 벌써 40여 년이 지났다. 이제는 기초적 이론 연구에만 국한하던 관심의 영역을 넓혀서 절실한 현실문제에도 시선을 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철학이라는 것이 본래 남의 생각을 되씹는 가운데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무엇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다. 옛시대 또는 남의 나라를 배경으로 삼고 남이 써놓은 책들에서 시작하여 그 책들 안에서 끝나버리는 이야기에 종사하여 밥을 먹는 것만으로 철학자가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떳떳이 얼굴을 들 수 있었던 시대가 꼬리를 감추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현실문제를 외면할 명분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한국의 철학자들이 현실문제에 달라붙어야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의학의 수준이 아무리 높이 올라간 나라에 있어서도 기초의학에 종사할 사람은 계속 연구실을 지켜야 한다. 해부학자나 생화학자까지도 개업의가 되겠다고 나선다면 말도 아니다. 철학에 있어서도 기초이론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순수한 학문을 위해서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계속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뜻은, 한국의 철학자들 가운데 적어도 상당수는 우리 현실문제와 정면에서 대결함이 바람직하며, 순수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위해서도 우리 자신의 창의에 호소하는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함에 있다. 우리가 남의 나라 사람들의 철학책 속에 갇혀 있는 동안 철학다운 한국의 철학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옛 문헌에만 매달리는 동안 한국철학에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철학의 처녀지를 바로 우리의 현실과 우리 자신의 두뇌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 앞에는 어렵고 심각한 문제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에 진학하기를 희망하나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자가 ‘불량소년’또는 ‘청소년 범죄자’의 길로 전락한다. 사람들의 인권의식 내지 평등의식은 날로 높아지는데 빈부의 격차는 도리어 벌어지는 추세여서, 저소득층의 불평과 불만이 은연중에 누적되어 간다. 일부의 대학생들은 교수들의 강의는 외면하고 금서목록에 오른 이념서적만 탐독할 뿐 아니라 과격한 행동으로 학원 내외는 고요할 날이 거의 없다, 해마다 늘어나는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는 가운데, 도시는 실업자로 고민하는 농어촌의 일손 부족으로 피로하다. 그리고 그 밖에도 결코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문제들이 일일이 매거할 수 없을 정도로 도처에 흩어져 있다.
우리들을 괴롭히는 문제들의 근원은 대부분의 경우 욕구의 대립에서 오는 인간적 갈등이다. 남한과 북한의 대립에서 오는 민족의 비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학원문제나 청소년 비행의 문제도 그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거기 반드시 욕구의 대립이 있고 인간적 갈등이 있음을 본다. 욕구의 대립과 인간적 갈등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는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인간적 갈등의 문제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과거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어렵고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오늘의 갈등의 문제가 특별히 어려운 첫째 이유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갈등은 그 범위가 넓을 뿐 아니라 다중적 (多重的)이라는 사실에 있다. 오늘의 인간적 갈등이 광범위 하다 함은, 교통과 통신 그리고 교역의 놀라운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의 접촉 범위가 넓어졌고 따라서 욕구가 충돌할 수 있는 범위도 그만치 넓어졌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옛날 농경시대에는 사람들과 사람이 접촉하는 범위가 대개 인구 부락을 넘어서는 경우는 적었으나, 오늘날은 전국이 하루 생활권으로 좁아졌고 지구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까닭에 사람들이 직접 간접 접촉하는 범위가 한없이 넓어졌다. 접촉범위가 넓어졌다는 것은 이해 관계가 대립할 수 있는 범위 즉 사회적 갈등의 범위가 그만큼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늘의 갈등이 다중적 이라 함은, 크게 한편이 되어서 싸우는 큰 집단이 다시 내부에서 분열하고, 그 분열한 중간 집단이 또 다시 분열하며, 그러한 분열이 또 계속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세계가 둘 또는 세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그 진영이 다시 여러 국가로 나누어져서 각기 제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싸운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다시 가진 계급과 못 가지 계급의 갈등이 있고 도시와 농어촌의 갈등이 있을 뿐 아니라, 늙은 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이 있고 남성과 여성의 갈등이 있다. 한 가족 내부에서도 고부간의 전통적 갈등뿐 아니라 부자간에도 갈등이 생기고 형제간에도 갈등이 생긴다. 개인주의가 지나쳐 이기주의에 이른 현대인의 의식구조가 자초한 다중적 갈등이다.
오늘의 갈등을 유별나게 어려운 문제로 만든 둘째 이유는, 갈등을 다스려온 종래의 장치가 도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갈등을 다스려온 전통적 장치로서 윤리와 법이 있거니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종래 사용해온 이 두 가지 장치가 모두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윤리가 도전을 받게 된 이유는 우리의 전통윤리가 갈등 해결의 장치로서 구실을 하던 농경사회와 오늘의 도시화된 산업사회의 양상이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혈연과 지연으로 맺어진 좁은 사회 안에 활동의 범위를 국한하고 오순도순 살던 인간관계에 적합했던 가족주의적 윤리만으로는, 듣고 보지도 못한 사람들과도 이해관계가 가로세로 얽혀 있는 오늘의 복잡한 인간적 갈등을 해결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다음에 우리나라의 현행법이 도전을 받게 된 첫째 이유는 법을 만든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으며, 그 둘째 이유는 우리나라의 현행법이 딛고 선 바탕을 이루는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나라에 침투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나라의 역대 정권은 법의 모체인 헌법을 편리한 대로 뜯어 고쳤고, 그 밖의 법망도 강자들은 흔히 뚫고 나갔다. 앞장서서 법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범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서민층도 법을 무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체계가 딛고 선 이데올로기적 바탕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이론이거니와, 위정자가 ‘자유민주주의’의 이름만 내건 채, 실천은 외면한 틈을 비집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숨어 들어와 우리나라 법체계의 바탕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위정자들은 법과 물리의 으로써 사회주의의의 유입을 막으려 했으나 사상이란 본래 그렇게 막을 수 있는 유형(有形)의 것이 아니며,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정신을 배반함으로써 그 반대 이데올로기가 침투할 수 있는 허점을 확대한 셈이다. 문제가 어렵고 복잡할수록 그 해결을 위한 처방은 넓고 깊은 생각에 입각해야 한다. 보통 상식이나 주먹구구 또는 우연적 발상으로 해결을 모색하기에는 우리들의 문제는 너무 복잡하고 심각하다. 여러 시각에서 널리 고찰하고 치밀한 논리로 깊이 분석하는 사유의 과정에 붙인 이름이 ‘철학’ 이라고 말한 이 글 첫머리의 도입(導入)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우리의 현실은 절실하게 철학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절실한 요구에 일차적으로 응해야 할 책임은, 40여 년의 세월을 바쳐 철학적 사유의 기초를 닦은 한국의 직업적 철학계가 짊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복잡한 문제들을 직업적 철학자들의 힘만으로 풀어갈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이란 본래 일부 직업인이나 전문가를 위한 전유물이 아니며, 따라서 철학적 현실문제에 대해서 전문적 철학자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제로 오늘의 우리 문제는 전문적 철학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문제들이다. 우리들의 문제가 실천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철학과의 협력까지도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들이 당면한 문제의 예를 조금만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면 곧 알 수가 있다.
우리들의 현실문제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의 하나는 정치와 경제에 관한 문제이다.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된 이후 우리는 줄곧 ‘민주정치’를 내세우고 ‘자유경제’를 추구해 왔다. 내면적으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이 두 갈래의 영역에 있어서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현재도 풀리지 않은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다. 정치의 분야에 있어서는 ‘민주주의’ 의 이름만을 애용하고 그 참된 내실을 가꾸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여러 가지를 올린 바도 없지 않으나, 빈부의 격차와 외채의 누적 등에 관련된 어려운 문제들이 심각하다. 정치와 경제의 분야에서 우리다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은 단순한 정책 결정의 문제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며, 정치와 경제를 연구하는 사회과학과 같은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철학이 힘을 합해서 도전해야 할 성질의 문제들이다.
현실의 문제가 실천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자들과 사회철학과들의 폭넓은 협동만으로도 부족하다. 타당성과 설득력이 있는 이론의 수립을 위해서는 연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타당성을 가진 이론이 실천에 옮겨지기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의 실력층은 물론이요 국민 전체가 대국적이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해 온 한국의 역대 정권은 사회주의 계열의 사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이른바 ‘이념서적’들을 법으로 막는 동시에 전문적 하자들에게도 그 방면의 연구는 원칙적으로 금지해 왔다. 그렇게 한 결과로서 대학교수들의 사회주의 연구를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일부 젊은 대학생들이 숨어서 하는 ‘이념공부’는 막지 못했다. 학생들의 사회주의 연구가 어느 정도의 폭과 깊이를 가진 것인지는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울 것이나, 그 방면의 연구에 제약을 받은 교수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에 이른 사례는 허다하다. 이제는 범의 힘으로 사상을 막으려는 정책은 지양해야 할 때가 왔다. 적어도 전문적 학자들에게는 연구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정책적으로 선택된 결론을 정당화하는 일에 능한 학자들을 지원하는 대신, 자유롭고 성실한 연구와 대화를 통해서 우리나라 현싱레 맞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후원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적합한 좋은 이론을 정립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지하에서 ‘이념서적’을 읽은 젊은이들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적어도 문제의식을 가진 모든 국민의-광범위한 협력이 필요하다. 교수와 학생이 편을 갈라서 따로따로 이념문제를 연구할 일이 아니라, 열린 광장에서 함께 만나 공동의 관심사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충분히 서로 이야기할 일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의 전개에 있어서 각각 성실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며, 상대편의 주장을 들어줌에 있어서도 다같이 성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편의 주장의 옳은 점을 시인함에 서로 인색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한 원칙을 탐구함에 있어서, “진리는 하나요 보편적” 이라는 전제는 일단 접어두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과거에 누가 주장한 학설을 절대적 진리로 가정하고 그것을 종교적 정열로써 신봉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로크(Locke)는 마르크스(Marx)든 또는 그 밖의 어떤 철학자가 주장한 실천이론을 어느 나라에서나 타당성을 갖는 절대적 진리라고 밀어붙이는 태도는, 철학적인 태도도 아니 요과학적 태도도 아니다. 무릇 당위(當爲 )와 처방(處方)의 체계로서의 실천이론의 타당성 여부는, 그 이론 자체가 가진 내용과 논리를 따라서 단돈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과 그 이론이 적용되는 대상의 조건들과의 관계를 따라서 결정된다. 예컨대 어떤 정치철학의 실천이론이 타당성을 갖는가 아닌가는, 그 이론만을 따로 떼어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판단할 수가 없는 문제이며, 그 이론이 적용될 국가의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위시한 여러 가지 조건들과의 대조를 통해서 결정될 수 있는 문제이다. 어떤 실천이론의 시행(試行) 그 자체에 본래적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바람직한 사회를 건설하는 성과를 거둠에 궁극의 목적이 있다. 그런데 채택된 실천이론을 적용했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는 그 이론 자체에 내재하는 단독의 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이 그것을 채택한 사회의 실정에 맞는가 안맞는가에 주로 달려있다. 따라서 실천이론의 타당성 여부는 그 이론이 적용되는 사회가 어떤 사회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니, 어떤 이론도 절대적 보편적 타당성을 가졌다고 주장되기는 매우 어려움을 우리가 여기서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문제를 전문적 철학자들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음은 젊은 세대의 교육과 같은 일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당면한 젊은 세대의 교육 문제 가운데는 젊은이들을 어떠한 인품으로 길러야 하느냐 하는 인간교육의 문제가 있다. 오늘의 한국 젊은이들 가운데는 부모의 의사나 어려움은 외면하고 경제적 뒷받침만을 요구하는 이기적 풍조가 강하거니와, 이러한 상황에서 자녀를 어떠한 인간으로 어떻게 교육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그 밖에도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교육의 기본목표 설정에 관한 철학적 성찰이 필요할 뿐 아니라, 교육제도, 교육방법론 등에 관한 교육학자들의 연구도 있어야 하고, 연구의 결과를 실천에 옮기는 단계에서는 문교 당국의 현명한 결정과 일선 교사 및 학부모들의 적절한 노력이 절대적이다. 요컨대 우리는 젊은 세대 교육의 문제도 국 민 전체의 협동을 요구하는 종합적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현실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삼는 협동적 노력에 있어서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해결의 기본원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작업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사정으로 지금까지는 한국의 철학계가 이 작업에 거의 손을 대지 못한 실정이나, 이제는 서서히 움직여야 할 시점이 아닐까 한다. 우리들의 철학적 고찰을 기다리는 현실의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무사히 많고, 그 어느 것도 어렵지 않은 것이 없다. 이 많은 난제들을 오늘의 한국 철학계의 역랑으로 만족스럽게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들과 씨름을 하는 가운데 우리의 역량도 점차 커 갈 것이다. 무리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나, 기약 없이 늑장만 피울 수도 없는 상황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하였다. 작은 힘도 여럿을 합하면 큰 힘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 현재 우리 한국이 고민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은 한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지성인으로서 숨쉬고 있는 우리가 우리들의 사명에 비추어 힘을 합한다면, 언젠가는 노력한 만큼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시작이 반이다”고도 하고, “낙락장송(落落長松)도 근본은 한 알의 씨”라고도 하였다. 길게 내다보고 꾸준히 걸어가면 천리길도 목적지가 보일 날이 있을 것이다.